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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인체 현상

숨 쉴 때마다 피가 흐르는 병: 혈관 파열 유전질환

by west-find-1 2025. 4. 30.

숨 쉴 때마다 피가 흐르는 병: 혈관 파열 유전질환

 

▌거부할 수 없는 일상 속 출혈: 유전성 혈관 질환의 시작

어느 날 아침, 코를 훌쩍이는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 시작된 출혈이 멈추지 않고, 가만히 숨만 쉬어도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는 일이 반복된다면 어떨까? 이런 믿기 어려운 증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HHT, Hereditary Hemorrhagic Telangiectasia)”**이라는 질병이 도사리고 있다. 이 질환은 전 세계 인구 5,000명 중 1명꼴로 나타나는 드문 유전 질환으로, 혈관벽을 지지하는 결합조직에 이상이 생겨 혈관이 너무 쉽게 터지거나 누출되는 증상을 동반한다. 특히 코 안, 입 안, 폐, 위장관, 뇌 등 매우 다양한 부위에서 출혈이 나타나며, 환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흘리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이 병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되기 때문에 부모 중 한 명이 HHT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50% 확률로 전달된다. 가장 두드러진 초기 증상은 반복적인 코피로, 대개 10세 전후에 시작되며, 성인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초기에는 단순한 코 점막의 출혈로 여겨지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내부 장기에서의 출혈로 이어지며, 폐출혈이나 위장관 출혈로 인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숨 쉬는 것조차 혈관에 충격이 되어 출혈을 유발하는 이 질환은, 단순히 “출혈이 잘 나는 체질”로 오해되기 쉽지만, 실상은 훨씬 더 위협적인 유전적 뇌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혈관이 스스로 붕괴되는 구조: HHT의 생리학적 이해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의 핵심 병리 메커니즘은 바로 혈관 구조의 기형에 있다. 이 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정맥과 동맥을 잇는 중간 단계의 모세혈관이 비정상적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혈류가 고압 상태로 직접 정맥으로 유입되며, 그 과정에서 혈관 벽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고 결국 파열로 이어진다. 혈관이 확장되어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지지할 구조조직이나 단백질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압력 변화만으로도 쉽게 붕괴되는 것이다. 이처럼 HHT는 혈관의 ‘기능’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위태로운 상태로 설계된 유전적 질병이다.

게다가 환자에 따라 뇌나 폐, 간 등 중요한 장기에 **동정맥 기형(AVM)**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치명적인 내출혈이 발생할 수 있으며, 폐의 동정맥 기형은 산소교환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만성 저산소증이나 심부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 뇌혈관 기형의 경우에는 뇌출혈이나 뇌졸중으로 연결되며, 때로는 돌연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질환의 가장 위험한 점은 출혈이 항상 외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피는 쉽게 인식되고 처치할 수 있지만, 장기 내출혈은 조용히 진행되다가 갑작스럽게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따라서 HHT는 반복적인 출혈만을 보고 간과할 수 없는, 전신에 걸쳐 혈관의 위기를 초래하는 질환이다.


▌치료법의 한계와 삶의 재구성: 희귀병 환자들의 목소리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의 치료는 완치보다는 증상 조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로 비강 내 혈관을 지지는 약물 도포, 레이저 응고술, 전기소작법 등을 통해 출혈 부위를 직접 처리하지만, 근본적인 혈관의 구조적 결함을 치료할 방법은 아직 없다. 또한, 내출혈 위험이 있는 환자들은 정기적인 MRI, CT 촬영 및 혈관조영술을 통해 상태를 확인하며, 위험도가 높은 부위는 색전술이나 외과적 제거를 시행하기도 한다. 항혈관형성 약물(anti-angiogenic agents)이나 면역 조절제가 실험적으로 투여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정립된 표준 치료는 없는 상태다.

이러한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은 단순히 신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사회적 제약을 겪는다. 반복되는 출혈로 인해 사람들과의 식사조차 피하게 되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예상치 못한 출혈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아이를 갖는 문제 역시 유전 가능성 때문에 커다란 고민이 된다. 이처럼 HHT는 질병 하나가 아닌, 삶 전체를 구조적으로 흔들어 놓는 희귀질환이다. 하지만 일부 환자들은 환우회 활동이나 유전 상담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가고 있다. 치료가 불완전하더라도 조기 진단과 꾸준한 관리,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더해진다면, 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도 보다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